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222
222
하란국의 비무대회는 영원의 투기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근접전투나 마법으로 인한 원거리 전투 등.
정말 다를 것이 없었을 터인데...
어째서 나는 거기에 나가야 하는 걸까? 구경꾼으로 참석하는 날이 단 한번도 없네...
-레시아와 동화되어 여성이 된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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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둘째주 월요일.
가을 특유의 아침과 밤의 신선한 공기는 폐와 뇌까지 들어와서 몸과 마음을 맑게 해줬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던 와중에, 앞머리에서 약간 왼쪽에 있는 고양이 머리핀이 말을 걸어오기를...
“이제 가을인가? 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봄이었거늘...처음 보았을 때는 엉금엉금 기어가던 주인도, 이제 두발로 서서 일어날 수 있...”
“잠깐 멈춰요.”
나는 레시아의 말을 막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태클을 걸기 위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현재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고운 목소리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평상시에 내가 이야기 하는 것보다는 체감상 30%정도는 더 높아진 목소리라고는 하지만, 아무튼 여성의 목소리는 어지간히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지금 레시아에게 태클을 걸어야 할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머릿속은, 여러 문장을 이미 만들어서 출격대기 상태로 되어 있었다.
“모르는 보면 갓난아기 때부터 레시아가 절 키운 줄 알겠네요. 저하고 레시아는 올해 봄에 처음 만났거든요? 그 이후로 산전수전공중전을 뛰어 넘어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레시아를 만난 기억이 없어요.”
“그런가? 그럼 설정에 주인과 짐은 갓난 아기 때부터 만난 적이 있다고 집어넣으면 되겠군?”
“어느 소꿉친구 설정을 따라 하지 마시죠? 그리고 설정을 멋대로 집어넣는 마왕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간혹 글쓴이가 세계관을 제대로 설정하지 않아서, 순간순간 아이디어를 막 집어넣어 엉망으로 만든다고 해도, 레시아 마저 그 혼란을 가중시키면 이 세상은 난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제 4의 벽을 밥 먹듯이 부수는 주인보다는 점잖은 것이라 생각한다.”
“댁도 부수잖아!”
“무슨 소리를? 짐은 차원이동을 통해 글쓴이의 집을 계속해서 들락날락 하는 것뿐이니라. 물론 주인과 짐이 잘 이어지도록 진행을 하라는 것이라던가, 스토리는 신경 쓰지 말고 주인을 더 굴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왠지 했을 것 같은데요...만일 그런 소리를 안 했다면, 제가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한 가득 소리를 친 후에 거울을 보자, 연보라 빛이 반사되는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띈 소녀는 이내, 한 숨을 선택하고 그대로 내쉬는 모습이 내 눈에 비춰졌다. 아무래도 머리카락과 눈의 색상은 레시아의 영향을 받았는지 몰라도, 애초에 내가 신들을 담을 수 있는 몸이라고는 하지만, 마왕까지 담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전에 레시아가 말했던 것으로는 저는 신을 담을 수 있는 몸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마왕인 레시아도 담을 수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혼란이 오고 있으니까.”
레시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짐은 운이 좋게도 상당히 강력한 마왕이니라. 지금 짐의 입지는 마신 후보로 올라와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 따라서 짐은 실질적으로 보면 마왕이 아니라 마신의 입지에 올라와있노라. 다만, 마왕으로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다른 세대의 마왕 후보들이 다른 곳에서 난리치고 있는 동안, 짐은 계속해서 마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레시아. 제가 말한 요점은 레시아는 마왕인데 어떻게 신격화가 되는 것처럼 영향을 받느냐는 소리에요. 레시아의 지금 입지가 마신과 동등하다는 소리는 새로운 설정이군요?”
레시아는 “칫! 억지로 구겨 넣었는데 벌써 들키다니.”라며 혀를 찼다. 레시아의 힘은 가늠이 안 갈 정도로 강력하지만, 마신과 관련된 소리는 거짓말이겠지.
“애초에 신격화가 아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페어링이 강해진 지금은 주인의 상태 중에서, 일부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모습만 바꾼 것이니라. 지금 강해진 듯한 이유는 주인이 현재 여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고, 그만큼 마나의 친밀도가 잔뜩 높아진 것이라 보면 된다.”
“뭐랄까. 제 본연의 힘을 내기 위해서는 꼭 누군가를 담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보통 다른 곳에서는 뭐랄까...엄청나게 강해져서 혼자 무쌍을 찍고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타인이 도와줘야 그나마 제 몫을 할 수 있는 그런 경우다. 용사나 영웅들처럼 혼자만의 힘으로 싸워나가는 것이 남자들의 로망이자 저력이 아니던가? 나는 최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만...다른 이들의 의견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아마 하렘이 남자들의 로망이라고는 하는데...
하렘도 하렘다워야 로망이지...사냥감처럼 노려지는 이 상황은, 오히려 로망이라기보단 야생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래도 주인의 DPS는 여성일 때가 더 잘나온다.”
“초당 공격력이 더 높다는 이유로 이 모습이 더 좋은 건 아니잖아요?”
마당을 빗자루로 쓸어 내리면서 흙먼지와 낙엽은,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차곡차곡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귀엽지 않는가? 다른 남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주인을 향해 한 번씩은 돌아보게 되는 외모이니라. 이것보다 더 귀여워지면 아무래도 살인병기가 될지도 모르겠군. 만일 짐이 인간계를 침략했을 때 주인을 사용할까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에요? 게다가 저도 인간이라고요. 마계에서 침략을 하면 제가 레시아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인데.”
만일...
마왕이 다른 곳에 있는 마왕처럼 침략을 일삼고, 다른 종족들을 노예로 만들면서 유린하며, 천계에 있는 신과 여신들의 수호를 받아 토벌하는 입장이 되었다면, 여장도 아닌 여성화가 되어서 비무대회에 출전하는 클리셰는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첩이 응원단장이라는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마왕님!”
잡화점의 문을 터프하게 열은 마리아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이번 비무대회로 인한 피해자는 나 뿐만이 아니다.
“검은 달의 여왕인 첩이 이런 하늘하늘한 치어리더 복장을 입고 응원을 하라니요!”
연한 초콜릿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흰색 바탕의 치어리더 복장이라니.
“귀여우니까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는가? 주인.”
“귀여우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마리아는 내 말에 잠깐 경직을 당한 듯. 아무런 말 없이 얼굴을 붉히다가 다시 고개를 흔들어서 냉정을 되찾았다.
“첩은 여왕이니라! 여왕의 위엄이 이런 곳에서 깨지면 안 된다고!”
그러고 보면...루나는 비무대회가 열리기 전에 특별 공연을 한다고 했었지? 비무대회에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몬스터까지 관중으로 끌고 올 생각인가? 관객에는 모든 성별이 참여가 가능해도, 모든 종족이 참석 가능하다는 소리는 잘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칸포리우스 제국에 있는 영원의 투기장에서는 모든 종족이 신청할 수 있다.
“오오...!”
옆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감탄사의 주인은, 부드러운 옥 빛을 띄고 있는 옷을 입고 있던 초량이었다. 초량은 비무대회에 참여하지 않는 듯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최근에 잡화점에 출입하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예뻐! 집에 목줄을 채워 넣고 키우고 싶을 정도야!”
“예전에 그런 말을 한 번 들은 적이 있던 거 같은데? 그리고 멀쩡한 사람에게 목줄을 채워 넣지마. 네가 어디 나오는 S데스냐? 네가 해수면을 얼릴 수 있는 능력자냐고.”
하지만 나의 태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리저리 내 모습을 둘러보는 초량의 입은, 쉽게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니까 기분은 어때?”
“그건 네가 남자가 되어보면 될 것 같다만?”
여전히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의 시선이 이곳 저곳을 향하면서 품평회를 하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연보라 빛의 머리색상은 자연산이잖아? 대체 어떤 일을 해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이건 레시아의 머리색상이야. 붉은 눈도 그렇고.”
“매니악스러운 포니테일이라니...마왕님도 꽤나 잘 아시는 분이잖아?”
“매니악스러운은 또 무슨 말이야? 혼종을 창조하지 말고 제대로 된 말을 사용하도록 해.”
이윽고 초량의 손가락은 내 뺨을 눌러보면서, 내 스트레스를 순식간에 120%정도 올리기 시작했다. 제길...그보다 어떻게 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본 거지?
“초량.”
“오오! 상당히 말랑말랑해!”
“그만 누르고! 어떻게 한 눈에 보고 나라는 것을 알아 차린 거야?”
“그야. 예전에 머리가 하얀색일 때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지, 물론 그때는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빛 공포증이 그렇게 무서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초량은 아픈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피어 오르는 듯이. 연약해 보이는 몸을 천천히 떨고 있었다. 빛만 봐도 무서워서 난리 친다는 빛 공포증으로 인해, 한동안 눈을 감고 살아야 할 정도라고 하니까.
“그리고 윈디에게도 일부 들은 내용이 있고. 그 모습으로 은빛 송곳니를 이겼다면서?”
“...그 할아버지는 날 봐준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실력의 5%도 내지 않았어.”
아니...지금은 이게 아니라.
“우와~! 이 꼬마도 귀엽다!”
초량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어느 사이에 내 뒤에 있는 마리아의 볼을 부비부비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순간적인 공격에 대응을 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소리만 지르기 시작했다.
“놔라! 첩은 검은 달의 여왕이니라! 그리고 꼬마라니? 지금 이 신체나이는 20세가 넘는다고! 성인이란 말이다!”
아무리 봐도 외견으로는 14세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귀여운 아이도 이 잡화점에서 산다니...안 되겠어. 나도 짐을 싸서 이곳으로 당장 거주를...”
“하지마!”
초량마저 잡화점에서 살면...하루에 10분 간격으로 잡화점이 개판이 날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초량이 잡화점까지 온 목적은 나를 하란국으로 인도인접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귀여운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초량의 성격상 30분정도 늦어버렸다. 물론 이 궁궐은 류하 씨. 즉 하란국의 여제가 있는 장소이고, 금색의 금룡포를 입고 위엄 있게 앉아 있는 류하 씨는 소리를 내었다.
“카일은 남고 모두 돌아가거라.”
““예. 폐하.””
초량과 더불어 내부에 있던 신하들이 다 빠져나가고, 모든 인원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카일은 이리로 오거라.”
“...네. 그러죠.”
류하 씨에게 가까이 가자마자 순식간에 내 팔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무릎 위로 앉히기 시작했다.
“저기...여제님?”
“둘만 있을 때는 여를 류하 씨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랬었죠. 류하 씨. 그보다 레시아도 같이 있습니다만? 이 모습은 레시아와 같이 동화된 모습이라고요?”
“상관 없노라.”
뭐랄까. 끌어 앉으면서 행복해 보이는 류하 씨의 얼굴을 보고는, 레시아는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대는 짐이 있는 자리에서도 눈 깜빡 하지 않고 주인과 스킨쉽을 하는 군?”
“여는 그저 카일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보다 좋은 모습이 아니던가? 이 모습을 할 수 있는 것도 마왕이라서 그런 것인가?”
“짐이 마왕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차피 그대도 상사병에 쓰러져서 죽기 직전까지 가다가, 주인의 친구가 살려준 것을 경험했으니 그대에게 당장 주인에게서 떨어지라는 말도 못하겠군.”
그렇군...저번에 하란국에서 베가프를 급히 파견한 이유가 상사병이기 때문에...
“아니 잠깐. 멈춰요. 제가 뭔가 터무니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상사병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가서 아우리스 여신의 축복을 받아 겨우겨우 살아났다고요?”
류하 씨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내 시선을 피하면서 홍조를 물들인 것으로 보아.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 없이 부끄러운 경험인가 보다.
“그날. 백장미를 읽다가 메이드 복을 입은 카일의 모습에 순간 호흡곤란이 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여는 병상으로 누워있는 상태였다. 모든 신하가 걱정을 하는 나머지 손쉽게 일어날 수가 없어서...그만 꾀병을 좀...”
그럼 터무니 없는 이유로 예전에 내가 베가프를 찾아오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냐!!!
이것도 따지고 보면 백장미 때문에 일어난 일 아냐!!!
그리고 그거 상사병도 아니고!!!
“뭐...진실은 가끔 잔혹한 법이니라. 주인.”
머리가 멍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느꼈고, 레시아는 그런 나를 알아차렸는지 위와 같은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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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6의 시작.
y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