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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군과 하란국의 공방전은 서서히 끝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대략 2주가 흐른 뒤에 아직까지 용사가 루니아 누나의 표적으로 지내는 동안, 리제로트가 칸포리우스 제국의 성기사단을 이끌고 찾아왔기 때문이었고, 결계를 해제한 하란국의 여제 또한 다시 강력해진 상태였다. 아직까지 피해복구를 하느라 밖에서 힘을 쓸 때쯤. 하란국 내부의 외교에서는 의외로 상황이 좀 심각해지고 있었으니...

 

성녀는 지금 용사일행과 같이 움직이고 있는데, 지금 칸포리우스의 성녀가 없다는 것을 빌미로 넘기라는 말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닙니까?”

 

대주교님은 그녀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내린 방침입니다. 지금 천계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성녀의 이름으로 여신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여신은커녕 천계가 거의 전멸 되었다는 시나의 말을 기억했다. 다만, 아직까지 이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식을 좀 깨달을 필요가 있는데.

 

저는 성녀가 아니라 잡화점 주인이라니까요...”

 

리제로트가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얄미운 웃음이 저절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금발 인형처럼 잘 가꿔놓은 소악마적인 웃음이라니. 직접 당하는 입장인 나에게 있어선 속에 기름을 붙고 불을 부었는데, 또 다시 기름을 붇는 그런 상황이다.

 

칸포리우스 제국의 협력 조건이 성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니까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성녀만 주시죠?”

 

제가 어디 사고 파는 물건입니까? 리제로트 씨.”

 

사고 파는 물건은 아니지만...잘 간직해야 할 물건인 것은 확실하죠. ‘카린?”

 

말 한마디도 안 지겠다는 의지가 저 두 눈에서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극적인 희생장면을 내가 당해야 한다고? 용사그룹이야 루니아 누나에게 맡기면 상관 없지만, 지금 당장 떨어져서 걱정되는 것보단,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서 무슨 일을 당할 지가 더 걱정이 되었다.

 

보통 광신도들이 넘쳐흐르는 곳에 들어가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진압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나에게 목줄을 채워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 가도록 하죠. 어차피 성녀도 아닌데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잠깐만 보고 오면 해결 될 일이잖아요?”

 

하지만 나에게 힘이 있으니, 그렇게 썩어빠진 녀석들이 대신관들이라면 교육을 하면 되고, 만약 아니라면 차분하게 다음을 향해 나아갈 생각을 하면 될 뿐이다. 어차피 잡화점에 수시로 다녀올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칸포리우스 제국 자체를 지도 밖으로 날려버리면 될 뿐이다. 아마 최후에 실행해야 할 일은 칸포리우스 제국을 없애는 것이 되지 않을까?

 

성녀님...”

 

옆에 있던 용사가 걱정되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저 애는 이 와중에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사람 화나게...

 

저는 괜찮아요. 당분간 루니아 누...언니를 붙여놓을 테니 전력이 될 거에요. 다만, 칸포리우스 제국에서 마왕성까지 용사들을 지원한다는 건 왜 없는 거죠?”

 

차라리 내가 없다면 나를 대신할 사람은 칸포리우스 제국에서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의 꼬리를 물려고 할 때, 얄밉게도 내 앞에 불쑥 고개를 들이민 리제로트가 친히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하란국을 지원하러 온 것뿐이지. 용사를 지원하러 온 것이 아니랍니다. 하란국은 칸포리우스 제국에게 있어서 마왕군의 진격을 저지할 배틀필드. 그곳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고, 거의 무료로 수도를 넘어 마왕군이 정복한 땅까지 되찾아드리는 거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병력을 쪼개 용사들을 지원하기에는 힘들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전투력의 공백이 생기고, 최후방에도 마왕군의 특수병사들이 침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 성녀님을 빛의 대성당으로 모시며 힘과 정신적인 지지를 얻는 것이야 말로, 칸포리우스 제국의 뜻이랍니다.”

 

이 녀석 죽을 위기를 넘겨서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더니, 완전히 빛의 교도에 교화되어 돌아왔잖아.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러면 우리들은 개고생을 해서 마왕성으로 가야 한단 소리잖아!”

 

키르갤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안 그래도 드래곤 피어가 모든 공간을 옭아매기 시작하자, 진한 살기를 내뿜는 성기사단들이 전부 무기를 꺼내 대치하고 있었고, 용사 그룹마저 무기를 빼며 싸울 의지를 보였다.

 

그만! 제가 가면 되잖아요!”

 

나의 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우고 분위기가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넌 좀 나중에 보자.”

 

리제로트가 환희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뭔가 꿍꿍이가 숨겨진 웃음은 내 눈을 피하지 못했다. 빛의 대성당에서 무엇을 봤길래 리제로트가 날 끌어들이려고 작정한 건지...

 

아무래도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 나를 반기는 듯 했다.

 

***

 

마차라는 건 많이 타보지 못했다.

잡화점에는 사키엘의 문이라는 편리한 이동수단이 있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생각하고 문을 열면 그 광경이 펼쳐지는데,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곧바로 하늘에서 번지점프를 할 수 있다.

 

그것도 줄 없이.

 

다만, 마차를 타고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는 길은 매우 따분한 여정이 되고 있지만, VVVIP 대우를 해주는 리제로트가 옆에서 꾀꼬리마냥 재잘거렸다.

 

그러니까...빛의 대성당에 뭔가 터질 거 같아서 나를 부르는 거지?”

 

. 용사 그룹들과 떨어뜨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건 카린 씨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 같거든요.”

 

그보다 그 광신적인 표정과 연기는 언제 연습한 거야?”

 

저는 의외로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는 설정이 첨부되어있던 거죠.”

 

스스로 설정이라고 말하지마. 정신 사나우니까.”

 

그보다 너무 딱 붙어있잖아? 마차는 마주보면서 가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그거 잊지 않으셨죠?”

 

아니. 잊었어. 완벽하게 잊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나.”

 

웃기지 마요!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진짜 몬스터를 풀어놓고 죽어라 달리던 저를 흐뭇하게 보셨잖아요!”

 

흐뭇하게 본적 없어. 그냥 잘 뛰네...라고 생각했지.”

 

봐요! 기억하잖아요!”

 

제길. 유도심문에 걸려버리다니.

내 옷을 붙잡은 리제로트의 힘이 점차 강해졌다. 꽉 잡고 더 이상 놔주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번 밤에 습격할 거니까 문은 잠가놓지 마시죠?”

 

“3중 잠금에 양자 잠금까지 할 테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밤에 습격하겠다는 예고를 직접 날리는 리제로트.

조만간 잡화점에서 내쫓아야겠다.

 

농담은 그 정도로 하고 마왕군이 진격하는 와중에 아직까지 정신차리지 못한 제국은 칸포리우스 제국이란 소리겠네?”

 

어차피 최후의 보루가 칸포리우스 빛의 대성당이잖아요? 그렇기에 기고만장해진 고위급 관리들은 자신의 배만 채우기 바쁘죠.”

 

그러면 그 녀석들을 전부 갈아 없애는 것이 주된 임무인가. 아무래도 성녀라는 직함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걸리기도 하고...

 

그럼 나를 어떻게든 구속해서 자기 좋을 대로 써먹겠다는 의미네. 지금 이렇게 나를 끌고 가는 의미 또한...”

 

. 맞아요. 하지만 카린 씨는 잡화점의 주인이잖아요? 성녀가 아니라?”

 

성녀가 아닐뿐더러 지금은 마리아가 나에게 동화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여신을 담을 수도 없는 몸이야. 시나는 어디에 있길래 너와 같이 있지 않은 거야?”

 

여신님은 지금 천계수복작업을 하고 있어요. 천계의 생태계가 말도 아니라는 말과 함께, 빛의 대성당에서 보자고 하셨거든요.”

 

어쨌든 칸포리우스 제국으로 가자는 건가. 하지만 천계의 생태계가 말이 안 된다는 말은 지금 모든 영혼이 어디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리일까? 사실 윤회를 거쳐서 환생을 한다는 작업은 천계에서 상급 신이나 하급 신 등. 깨끗한 영혼을 가진 영혼이 아닌 다른 모든 영혼들을 환생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지금 시나가 하는 일은 천계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과정이 아냐. 빛의 대성당에 있는 일원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피신한 것뿐이지. 다른 차원의 여신마저 피신할 정도로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다는 거야.”

 

시나가 무엇을 보았길래….

복구작업을 그만두고 숨어버린 것일까?

 

이 세상에는 정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야. 다른 외계문명에서는 행성자체를 정화한다고 하는데, 이 행성도 불바다로 만들면 모조리 정화가 되겠지? 그러면 내가 칸포리우스 제국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시답지 않은 녀석들이 날 구속하고 지 멋대로 하는 행위 또한 안 봐도 되니까. 좋아 전부 다 불질러 버리자.”

 

안 돼요! 저희가 살 곳이 없어지잖아요! 그보다 용사나 다른 사람은 무슨 죄에요!”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하지 않겠다니.

사실상 그렇게 해결했으면 30번은 더 하고도 남았지.

 

그렇다고 칸포리우스의 빛의 대성당이 초콜릿 공장마냥 좋은 곳은 아니잖아. 윌리 왕카가...”

 

윌리 웡카에요.”

 

넌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보고 말하는 거야?”

 

초콜릿 공장이라도 다녀왔나? 그거 황금티켓이 아니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고착상태를 만들고 있는 이유와 천계가 거의 망해가는 이유가, 칸포리우스 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러면 빛의 대성당은 신을 죽이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마왕군과 긴밀하게 진행해온 일일까?

 

그건 나중에 조사해보면 생긴 일이죠. 그나저나 오랜만에 좀 안아주시죠?”

 

내가 널 평소에도 안아줬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 하고 있는데?”

 

그래도 칸포리우스 제국 내에 들어가서 성공적으로 지원군까지 불러왔잖아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제가 이 위치에 올라오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요!”

 

오랜 세월 치고는 1년도 안 된 시간 속에서 병력과 물자를 지원한 사신으로 왔잖아? 그것만으로도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가늠이 오긴 해. 그리고 왜 멋대로 내 무릎에 누워있는지 알려줄래?”

 

은근슬쩍 내 무릎에 머리를 놓은 리제로트는 세상을 다 가진 편안함으로 기지개를 쭉 폈다. 마차가 아무리 넓다고는 해도 사람이 눕는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제약이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얼굴로 고양이 같이 고개를 이리저리 비벼댔다.

 

거기는 예쁜 애들이 없거든요. 뭐 정확하게 성녀와 더불어 성녀를 지망하는 무녀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무녀마저 없다고?”

 

빛의 대성당에선 신을 받을 그릇으로 모두 불충분하다며 내쫓았다고는 하지만, 이건 역으로 현재 천계에 신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잖아요? 하지만, 이걸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알면서도 숨길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천계는 어째서 멸망을 했는가? 아마 그건 엘티노스가 상급신으로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엘티노스가 없는 세계는 천계의 몰락과 함께, 마왕군과 인간의 끝없는 전쟁으로 인한, 칸포리우스 제국의 이익만을 챙길 수 있는 그런 부패된 세계라...

 

어차피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고양이마냥 애교부리는 리제로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바보 같은 짓을 확실히 끝내야겠어.”

 

덜컹거리는 마차만큼이나 심란한 마음은 여김 없이 나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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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이 에피소드도 끝내야 하는데...

잦은 출장과 잦은 야근이 초래한 최악의 연재를 만들어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날밤샌 사람에게 곧바로 광주출장가라고 하다ㄴ...)

 

그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실 감기기운까지 도져서 몸과 정신이 신비와 모험으로 가득한 멘붕의 나라로 가고 있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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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가를 제외한 이후로 세계는 대격변이 일어났고, 각본가가 있었어도 세계는 대격변이라고 말할 만큼 세계가 변했다. 리제로트는 대격변 이전의 마지막 인간이라고 봐도 좋고, 지금은 칸포리우스 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란국에 빨리 지원이 와서 마왕을 토벌하는 척만 하고 이곳의 진정한 흑막에게 진심펀치를 날린 후, 빨리 나는 남자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솔직히 흑막까지 안가도 남자로 되돌아가기만 했으면 좋겠지만, 잡화점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성녀로 오해 받는 내 입장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머리가 청색이었다가 검은색으로 물들은 전신거울을 보며, 오히려 더 단조롭게 청순해졌다는 표현이 맞을까? 의식하지도 않은 옆머리를 귀 옆으로 쓱 올려보았다.

 

후후...후후훗...후헤헤...”

 

뭔가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가...

 

세린. 침 닦아.”

 

쓰읍!”

 

머리색상만 다른 쌍둥이 자매처럼 생긴 세린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빛이 난반사되었다. 나를 볼 때마다 눈이 공허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동공 안에 붉은 하트 모양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솔직히 말하면 이건 무섭다고 해야겠지.

 

이번 흑장미는...이대로 가도오...”

 

거기. 카메라 내려요.”

 

...”

 

루니아 누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저번에 멋대로 찍었다가 카메라 자체를 소멸시킨 이후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여전히 TS빔을 반 강제로 맞아 여자로 있는 것도 불편하다고...

 

익숙해지지 않는 건 아닌가?

설마...아닐 거야.

 

카일이여? 주변의 공기가 왜 이리 숨이 막히는 것이냐? 첩은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만?”

 

그거야 마리아와 제가 엑시즈 소환...아니, 링크가 되어있으니까요. 그 덕에 매력의 랭크가 한 단계 올라가서 시시각각 우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뿐이에요.”

 

노린다고 한들 지금 카일을 포박하려고 하는 루니아 뿐 아닌가?”

 

아뇨. 잡화점의 인격인 세린마저도 노리고 있...뭐라고요!?”

 

뜬금없이 날아오는 루니아 누나를 피했다. 인간 미사일이라고 하면 루니아 누나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왔는데, 잡화점 벽 하나가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제 2파로 날아드는 미사일을 겨우겨우 막아냈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요!”

 

그치마안! 카린은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으면, 백장미와 흑장미에게 관심이 없는 걸요오!”

 

그 저주받을 잡지는 태초부터 관심도 없었어!”

 

어디서나 나오는 그치만!’이라는 단어를 무시하고, 오늘도 성녀인지 잡화점 주인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전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변수를 위해 대책을 새워야만 했다. 변수라고 한다면 어릿광대가 내 예상과 다르게 각본가가 아니었다는 것. 혹은 이 공간의 창조주가 변질 되었을 가능성.

 

7그룹 용사들이 나오기 전까지 마왕이 손쉽게 용사들을 모두 격파한 것은, 되려 모든 것이 각본에 의한 것이 아닐까? 아니라면...

 

되려 각본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나?”

 

각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상황이 되려 각본가에게 있어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가?

 

각본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다니요오?”

 

각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니까, 그러니까 지금 현 마왕이 용사들을 초기에 다 죽여버리고 제 7그룹 용사까지 제거하려고 하니까...”

 

마치 용사들이 전혀 필요 없는 것처럼...

 

마왕이 빨리 죽인 것도 뭔가 문제가 있지만, 7그룹의 암살까지 노릴만한 정보까지 어떻게 얻었을까요? 각본대로 움직였다면 아예 용사가 다 사라지고 암울한 미래가 남았다가 끝 아닐까요?”

 

어떤 미래든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결과가 나오기 마련, 아마 이곳은 배드앤딩으로 갈뻔했다가 내가 오고 나서 천천히 개선되어가는 모양이다.

 

그러면 현재 각본가의 힘은 매우 약하다는 의미잖아요오? 그러면 더욱 더 어릿광대가 아니게 되죠오.”

 

아니, 어릿광대가 힘이 약해졌을지도 모르잖아. 섣부르게 판단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다른 차원의 영향력으로 힘이 약화될 수도 있...진 않겠구나.”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도 영향을 받지 않은 라는 존재가 있었다. 수많은 차원이 무너지고 부러져도 다른 시공에 나타났을 때, 나만 패널티를 입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게 잡화점의 비밀 중 하나일지도 모르고...

 

마리아는 내 머릿속에서 다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세린 또한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나를 지켜만 볼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답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각본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데드엔딩을 향해 나아가던 진로가 다시 바뀌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희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죠. 아직까지는 정보가 너무 없어서 추측은 이 정도로 끝냅시다.”

 

히드라를 감싼 왼팔이 살짝 저려오기 시작했다. 비록 히드라는 월식에 거의 연결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어디선가 어릿광대가 조소라도 하듯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히드라?”

 

[끊어진 연결을 누군가가 억지로 연결하려는 느낌이 들었기에, 지금 차단방벽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

 

. 어릿광대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여전히 날 찾고 있는 중인가 보네.”

 

유랑극단에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어릿광대는 끝까지 날 쫓아와서 죽이려고 할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할까? 지금 당장 급한 불은 아무래도 용사그룹들인 거 같지만, 하란국에서 일방적으로 버티기만 하는 이 상황에서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나는 조금 더 잡화점에 있기로 했다.

 

오랜만에 잡화점도 영업하고, 생각도 정리할 겸 청소를 시작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었다.

 

그러면 저는 요리를 하러 가볼게요오~”

 

하지마!”

 

루니아 누나는 히잉...”하며 죽는 소리를 늘어뜨렸다. 누굴 암살하려고 요리를 하겠다는 거야?

 

***

 

잡화점이 열린 새벽에 마왕은 여김 없이 놀러 왔다. 이제 마리아가 이곳에 동기화를 하여 자리잡는 순간, 내가 기억하는 레시아와 마왕이 서로 대면을 할 거 같은데,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일단 잡화점이 폭발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기가 어딘가의 하얀 병원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자주 폭발하는 잡화점 속에서, 세린은 거의 체념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만 보겠지.

 

그래서 짐의 정예병들은 결국 잡화점 주인의 소속이 되었다는 건가?”

 

정확하게는 검은 달의 여왕이지만, 이 검은 머리도 검은 달의 여왕으로 인해 생긴 거고, 지금 상황에서 마왕뿐만이 아니라 신도 때려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대가 세계정복을 하면 되지 않는가?”

 

나는 용사그룹에 소속되어있는 잡화점 상인이니까.”

 

성녀이지 않는가?”

 

성녀 아니라고!”

 

아직까지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나는 성녀로 취급되고 있는 모양이다.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절대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고, 잡화점 앞에 엘티노스라고 버젓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잡화점 주인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걸로 봐선, 정말로 이곳에 엘티노스가 없는가에 대해 생각도 해봐야 한다.

 

하지만 마왕 레프리시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엘티노스는 한번쯤 거론되어야 하는 대영웅 중 하나. 솔직히 그 양아치 같은 아저씨가 어떻게 상급 신이 되고 영웅소리까지 듣는지는 정말 의문이지만...

 

엘티노스부터 찾아봐야겠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엘티노스라는 자를 찾기 위함이라?”

 

마왕은 검은 고양이의 모습이 되어 자신의 앞발을 그루밍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고양이 모습으로 찾아 온 거야?

 

솔직히 엘티노스가 죽은 이유라면 2가지로 추측되거든. 하나는 마왕이 수작을 부려서 미리 암살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각본가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서 서로 기 싸움을 하는 와중에 엘티노스가 죽어버렸다.”

 

그러면 그 둘을 전부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당연히 있지.

 

시간대를 찾아서 뒤집어 엎으면 돼. 복수자들도 양자영역까지 들어가서 되돌리곤 했잖아?”

 

시간대를 찾아서 뒤집어 엎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지금 이 차원의 시공간을 전부 찢어발길 셈인가?”

 

시간여행의 부작용을 생각하질 못했네. 확실히 지금 과거를 뒤바꿔버리면 미래가 어떻게 산산조각이 날지 모르는 일이잖아?

 

아니지. 미래가 산산조각 나도 돼. 그 놈의 백장미인지 흑장미인지 빌어먹을 잡지책을 다 불태울 수 있다면 말이야!”

 

그렇다고 시공간 하나를 멸망시킬 셈인가?”

 

시공간 하나로 내가 그 잡지를 찍지 않아도 된다면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을 해보면 루니아 누나는 시공간을 찢어서라도 찍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네...

 

조만간 백장미 특집이 시.... 로 바뀌는 건가.”

 

그 기괴한 폭풍으로 들어가는 건 짐도 사양이다만...”

 

무릎 위에 올라간 검은 고양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도대체 시공의 폭풍은 왜 알고 있는 거야? 조만간 거기에 들어갔다 나오는 거 아닐까? 고양이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폭풍이야기는 그만두고 정말로 과거로 가서 찾아올 셈인가?”

 

과거로 가서 찾아오는 거 말고 현실적인 방안이라면, 다른 평행차원에서 소환하는 수 밖에 없어. 그럼 그 평행차원은 난리가 날 거고 시공간 2개가 찢겨질 위기가 찾아오는 거지. 일이 잘 해결되면 시공간 중 적어도 1개만 찢어지고 나머지 하나는 무사해. 좋은 일이긴 하지.”

 

아니. 절대적으로 좋지 않다. 잘 해결되는 전제가 이미 시공간이 찢겨나가고 있지 않는가? 그보다 현실적이 아니다!”

 

2번째도 실패인가. 그럼 3번째로...

 

엘티노스의 환생체를 만든다.”

 

이번엔 환생인가?”

 

보통 윤회라는 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뿐이지, 결국에는 그 영혼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진 이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오거든. 내가 보았을 때 엘티노스는 절대적으로 부처나 그런 게 될 수 없어. 상급신도 연줄이 있어서 승천한 거지, 5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나타나는 것도 좀 어처구니 없겠지만, 대마법사 엘티노스라면 가능성이 높다고 봐.”

 

어쩌면 이미 환생을 해서 다른 사람의 등을 쳐먹거나.

여자 뒤나 졸졸 쫓아다니면서 어떻게든 꼬시려고 하겠지.

 

가능성이 많은 건 좋지만, 확률은 아무래도 길을 걷다가 개구리가 나에게 인사하는 정도의 확률인 거 같아.”

 

내가 생각한 모든 답안은 전부 가능성이 없었다.

 

환생체를 만든다고 하여도 이미 환생했을지도 모르고...다른 차원에서 엘티노스가 객사하여 그 차원의 영혼을 납치한다고 해도, 사실상 윤회라는 체계는 어느 누구도 섣부르게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지.”

 

지금의 내 힘이라면 가능할까?

아니, 그런 미친 짓을 감행한다면 난 정말 인간을 포기해야 한다.

어디서 로드롤러를 끌고 와서 죠스타 가문에게 내려찍지 않는 이상...

 

터무니 없는 상상에 짐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구나.”

 

그건 내가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서 그런 거야.”

 

아직은 명확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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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부터 남다른 카린(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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